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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조봉암과 10월 항쟁
2025년 12월 24일 오전 10:2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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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조봉암 72%, 대구... 1946년 10월항쟁, 대구의 과거와 현재 요즘 뉴스를 만들어 가는 사람 중에 대구(경북 포함) 출신이 많이 눈에 띈다. 지위도 매우 높은 사람들이다. 사사로운 자리도 아닌 공적인 자리에 있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지위에 어울리게 실질적으로 자랑스러운 대구 사람으로 거론된다면 참 좋겠는데 ‘자랑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공사(公私) 막론하고 조심해야 하는 게 공인의 처사인데 제어장치 가동없이 말(언어)을 하는 이들도 있다. ‘대구스럽다’는 조어(造語)까지 다시 나돌 정도이다. 대구의 인물들, 왜 이러나? 대구가 언제부터 이러했나? 송언석은 3선 국회의원이자 야당이 된 국민의힘 원내대표이다. 김천 출신으로 대구에서 공부(고교)한 그는 지난달 10일 국회에서 민주당 대표가 “(수거대상이 적힌)‘노상원 수첩’이 성공했더라면 자신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연설을 하던 도중에, “제발 그리됐으면 좋았을걸”이란 말을 뱉고 말았다. 김정재는 포항 출신으로 포항에서 공부한 국민의힘 소속 3선 국회의원이다. 그녀는 지난달 25일 국회에서 의원들이 ‘경북·경남·울산 초대형 산불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을 표결하던 중에 그만, “호남에서는 불이 안나나?”라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김정재는 ‘찬성표를 던져달라’는 뜻으로 ‘경상도 말(사투리)로 축약해 하다보니 그래 됐다’고 말했다. 이 특별법은 재석 의원 218명 중 찬성 213명, 기권 5명으로 가결됐다. 말은 몸에서 한 번 밖으로 나오면 다시 집어넣을 수 없는 불가역적인 구조이다. 말은 자기자신을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 하는 표현법이다. 자기만 아는 걸로 말을 하면, 상대가 이해를 못하고 오해하면, 그것은 의사 표현이 아니라 해를 끼치는 도구로 전락한다. 송언석과 김정재는 둘 다 서울의 명문대에다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딴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데도 말을 그렇게 해서 나쁜 뉴스를 만들어 가고 있다. 조희대는 현 대법원장이다. 그는 경주 출신으로 대구에서 공부했고 서울 명문대 졸업, 제23회 사법시험 합격, 군법무관, 판사, 부장판사, 법원장, 대법관을 거쳐 2023년 1월 제17대 대법원장이 된, 평생 법관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지난 대선을 30여일 앞둔 시점(5월 1일)에서 야당 대선후보 이재명의 공직선거법 위반사건을, 2심 무죄였던 이 사건을 직권으로 전원합의체에 회부했고, 유죄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대법원 상고 9일 만에 이뤄진 초고속 판결이며, ‘사법 쿠데타 감행’이란 거센 비판을 받았다. 직권남용,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공수처에 고발당했다. 이재명 당선이후 그는 여당의 사퇴압박을 받았다. 대법원의 대선개입 의혹 관련 국회 청문회가 지난달 30일 열렸다. 그는 출석을 거부했다. 그의 탄핵 청원도 벌어지고 있다. 이진숙은 방송통신위원장이었다. 그녀는 성주 출신으로 대구에서 여고와 경북대 사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석사 및 서강대 대학원 언론학석사인 그녀는 MBC 보도국 기자로 출발, 줄곧 MBC에서 차장 부장 국장 본부장 워싱턴지사장 대전MBC사장을 거쳤다. 특히 이진숙은 1990년 걸프전쟁, 2003년 이라크전쟁을 취재, 최초의 여성 종군기자로 명성을 떨쳤다. 작년 7월말 많은 반대 속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에 의해 방송통신위원장에 임명된 그녀는, 국회의 탄핵소추로 직무가 정지되기도 했고 복귀되기도 했다. 이진숙은 “민주당이나 좌파집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모든 걸 하는 집단”이라는, 정치적 중립에 위배되는 발언을 하는 등 그녀는 위원장 재임중 방송의 자유와 독립, 중립성 훼손 및 방송장악 등의 비판과 함께 ‘자격미달’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지난 1일 국회에서 ‘방통위 폐지, 방송미디어통신위 설치’ 법안이 통과돼 새로 방송미디어통신위가 출범함에 따라 자동으로 임기가 종료됐다. 이진숙은 국가공무원법·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경찰이 출석을 요구했으나 계속 불응해 지난 2일 자택에서 체포됐다. 송언석, 김정재, 조희대, 이진숙, 모두 대구(경북) 출신, 모두 명문고 명문여고, 명문대, 명문학과 출신, 박사학위 또는 적어도 석사학위가 있는, 머리좋은 수재임에 틀림없는 큰인물인데 왜 비난을 받는가? 이 모든 비난이, 비판이, 지적이 근거없는 매도에 지나지 않는가? 사실은 공인으로서 정도를 걸으며 정권에 아부하지 않고 남을 위해 일해온 분들인가? 아니면 누추한 인물들인가? 나는 요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이들 네 사람이 대구(경북) 출신이라는 게 자랑스럽지 않다. 그 반대이다. 때로는 구토증이 일 정도다. 뛰어난 재능으로 많이 배운 학력과 오래 쌓은 경력으로 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큰 업적을 얼마든지 낼 수 있는 이들이, 말을 함부로 내뱉거나, 정권에 결탁해 아부하거나, 사퇴압박이나 탄핵이 거론되는 속에서도 솔직성 진정성의 자성하는 자세 대신 뻔뻔하기까지 하는 이들이, 도대체 왜 그러하게 됐는지, 무엇 때문에 그러한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구·경북만 ‘국민의힘’으로 완전도배된 현실은 전국을 둘러볼 때 정상은 아닐 것이다. 민주당 국회의원은 비례대표로 당선된 한 사람뿐이다. 대구 12개 선거구, 경북 13개 선거구 25명의 국회의원 모두 국민의힘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렇게 되면 지역의 국회의원들이 너무나 뛰어나고 열심으로 유권자인 지역민을 위해 헌신하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할 수도 있다. 반면 지역의 유권자가 어떤 연유에서 왜 그렇게 특정의 당만 보고 무조건 선택했는지, 누구의 호도가 있었는지, 모르고 그렇게 하게 됐는지 여러 가지 생각도 할 수 있다. 또한 지역의 언론은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올바른 언론보도를 하고 있는지, 어떤 신문은 왜 노골적으로 어떤 관점을 드러내며 제작하고 있는지, 누구에 의해 그러한지, 독자들은 그런 사실을 알고는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전국언론 지역언론 비교를 통해 분석 점검할 필요성도 느낀다. 만약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든지, 고도로 독자를 속이고 있다든지 하는 합리적인 과정으로 불공정한 근거가 도출된다면 시민공동체가 원인을 제거하는 노력도 해야 할 것같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는 부정선거였다. 엄청난 관권과 금권이 개입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이승만·이기붕 정·부통령 후보의 선전 전단은 전국의 초가 판잣집 전신주 산속 절에까지 뿌려진 데 비해 야당 측의 벽보는 보기조차 힘들었다. 이런 일방적인 벽보전과 함께 개표 과정에서도 부정이 자행됐다. 그렇게 한 투표에서 대통령 후보 이승만은 70%를 득표, 대한민국 초대, 제2대에 이어 제3대 대통령이 됐다. 무소속의 조봉암 후보는 30%를 받았다. 그런데 대구는 어땠을까? 이승만 27.7%, 조봉암 72.3%로 조봉암 후보가 압도적이었다. 또한 경북은 이승만 55.3%, 조봉암 44.7%로 조봉암 표가 전국 평균보다 월등히 높았다.(‘역사속의 대구, 대구사람들(2001), 대구·경북역사연구회 지음, 중심 펴냄. 282~294쪽 참조) 제 3대 대통령선거(1956년) 대구지역 득표율 자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 자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 조봉암(1899~1959)은 누구인가. 일제하 독립운동가, 초대 농림부장관, 제헌국회의원(무소속), 국회부의장, 진보당 창당, 1956년 대선에서 이승만에 이어 2위를 한 조봉암은 이내 이승만 정권의 제거대상이 된다. 조봉암은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 및 간첩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1959년 7월 31일 사형이 집행돼 이 세상을 떠난다. ‘사법살인’이었다. 50여년이 지난 2011년 대법원은 조봉암에 대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당시 판결은 잘못되었다”고 인정했다. 경기도 강화 출신의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선생! 대구의 진보적인 의식은 1960년 2.28의거에 이어 4월혁명을 선도했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선봉을 형성했다. (사)대구민주화운동기념보존회(대구시 중구 남산동) 앞 벽에 게시된 사진과 글 / 사진. 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사)대구민주화운동기념보존회(대구시 중구 남산동) 앞 벽에 게시된 사진과 글 / 사진. 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대구 중구 대구콘서트하우스 앞에 설치된 '10월항쟁 발상지' 표지판(2025.9.26) / 사진. 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대구 중구 대구콘서트하우스 앞에 설치된 '10월항쟁 발상지' 표지판(2025.9.26) / 사진. 평화뉴스 정준민 기자 그런 대구가 왜 이렇게 됐는지, 지역감정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생겨 확장돼 나갔는지, 지금의 흐름의 원초를 찾는 작업은 내일의 대구를 위해서도 대구시민에게 절실한 작업이다. 1946년 10월 1일, 수천명의 대구시민과 노동자들이, 대구역 앞에서 매점매석으로 인한 쌀값폭등으로 쌀을 못구해 굶으면서 “쌀을 달라!”며 시위를 벌였다. 대구 10월항쟁이다. 전국으로 확산했다. 79주년이 지난 1일이었다. 대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읽을 필요가 있다. 우리의 부모, 조부모 세대의 대구가 죽산 선생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던 이유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당시 정권의 하수인이었던 대법원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한 죽산 조봉암 선생을 대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영철 칼럼 45] 유영철(兪英哲) / 언론인.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언론정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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