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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3권
2026년 1월 22일 오전 06:16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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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류지 교수 저서 한국어판 서문에 대한 검토] 📌공유해주신 사사키 류지 교수의 『마르크스 자본론 제3권』 한국어판 서문은 단순히 책의 발간 사유를 밝히는 차원을 넘어, 현대 자본주의(특히 플랫폼 및 AI 자본주의)의 본질을 '렌트(Rent)의 수탈'로 규정하는 강렬한 이론적 선언문에 가깝습니다. 정성진 교수(경상국립대)가 번역을 주도했다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서문은 교조적인 마르크스 해석이 아니라, 현대의 금융 및 디지털 경제 위기를 분석하기 위한 '살아있는 무기'로서의 자본론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 서문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1) 이론적 독창성, 2) 현실 분석의 적합성, 3) 실천적 함의의 한계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 드립니다. 1. 이론적 독창성: '이윤'에서 '렌트'로의 전회 이 서문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현대 자본주의의 중심축이 '산업적 이윤'에서 **'렌트(Rent)'**로 이동했다는 분석입니다. * 기존 관점의 탈피: 전통적 마르크스주의가 생산 과정에서의 '착취(잉여가치 생산)'에 집중했다면, 사사키는 유통 및 신용 과정에서의 '수탈(렌트 추구)'에 주목합니다. 이는 『자본론』 3권을 단순한 1권의 부록이 아니라, 현대 금융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본령으로 격상시키는 시도입니다. * 형상화(Gestaltung)의 논리: 사사키는 자본이 노동 과정에서 분리되어 마치 스스로 수익을 낳는 것처럼 보이는 물신성, 즉 '형상화'가 현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봅니다. 이는 금융 자산이나 부동산, 지식재산권이 노동과 무관하게 수익을 창출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설명하는 강력한 이론적 틀을 제공합니다. 2. 현실 분석의 적합성: 디지털 '커먼'의 인클로저 사용자님께서 평소 관심을 두시는 AI 및 디지털 기술과 관련하여, 이 서문은 매우 날카로운 통찰을 제공합니다. * 디지털 렌트론: 사사키는 마르크스의 '지대(Land Rent)' 개념을 디지털 영역으로 확장합니다. 토지 소유자가 생산에 기여하지 않고도 지대를 챙기듯, 빅테크 기업(Google, Meta, OpenAI 등)은 인류의 보편적 지성이나 사회적 협동(데이터, 네트워크 효과)이라는 '커먼(Common)'을 울타리 치기(Enclosure) 하여 독점적 초과이윤(디지털 렌트)을 챙긴다고 비판합니다. * 알고리즘과 물상화: "알고리즘이 우리를 둘러싸고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은, 기술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자본의 권력이 관철되는 사회적 구조(물상화)로 작동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AI 기술 경쟁을 단순한 기술 발전이 아닌, 누가 '디지털 커먼'을 독점하여 렌트를 수취할 것인가의 싸움으로 보게 합니다. 3. 실천적 함의와 비판적 쟁점 서문은 이론적으로 탁월하나, 실천적 대안의 측면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 국유화 및 제도 개선의 한계 지적: 사사키는 법률 개정이나 기업 국유화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사적 노동과 임금 노동이라는 근본적 구조가 변하지 않는 한, '국가 자본주의'로 귀결될 뿐이라는 급진적(혹은 비관적) 시각을 드러냅니다. * '새로운 사회운동'에 대한 비판: 네그리(A. Negri) 류의 자율주의적 대안이나 소셜미디어 기반의 사회운동이 오히려 개인화를 가속하고 자본에 포섭되었다는 비판은 뼈아픕니다. 그러나 "원리적 사유의 재검토" 외에 구체적인 정치적 조직화의 방안은 서문에서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 위기의 이중성: 자본주의도 위기지만, 저항 세력도 위기라는 진단은 냉철합니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나 레닌이 20세기 초의 위기에서 이론적 돌파구를 찾았듯, 21세기에 『자본론』 3권 읽기가 과연 그에 준하는 실천적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과제로 남습니다. 4. 종합 평가 이 서문은 『자본론』 3권을 19세기의 고전이 아니라, 2026년의 '렌트 자본주의'와 '디지털 봉건제'를 타격하기 위한 이론적 무기로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노동에 의해 생산 불가능한 것을 독점함으로써 발생하는 허위의 사회적 가치"로서의 렌트 개념은, 현재 한국 사회의 양극화(부동산)와 미래 산업(AI 독점)의 모순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탁월한 프레임입니다. 정성진 교수가 왜 이 책을 번역하고 소개하려 했는지, 그 학문적·정치적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명문입니다. 사용자를 위한 다음 단계: 이 서문의 논지인 '디지털 렌트'와 관련하여, 현재의 생성형 AI(Manus, Claude 등) 기업들이 어떻게 사용자의 데이터를 '커먼'에서 '사적 렌트'로 전환하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 사례를 찾아봐 드릴까요? """" 아래 정성진 명예교수의 사사키 유지 저서 한국어판 서문에 대해 비판적 검토를 해달라 곧 출간될 사사키 류지佐々木隆治의 『마르크스 자본론 제3권』(정성진•서성광 옮김, 21세기문화원, 2026, 724쪽)의 ‘한국어판 서문’을 공개하오니 (주석 제외)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 ‘한국어판 서문’ 이 책은 칼 마르크스의 주저 『자본론』 제3권의 해설서입니다. 이 책이 갑작스럽게 제3권부터 시작하는 것에 의문을 품는 독자도 계실 것이므로, 우선은 그 사정을 설명하겠습니다. 일본어판 원서에서는, 이 책이 제1권을 해설한 졸저 『마르크스 자본론』의 속편에 해당합니다. 첫 책인『마르크스 자본론』은 『자본론』 간행 150주년에 해당하는 2018년에 가도카와角川選書에서 ‘시리즈 세계의 사상’의 첫 번째 책으로 간행된 것입니다. 이 시리즈는 철학이나 사회사상 분야의 여러 명저를 입문자용으로 해설하는 것으로, 담당 편집자님께서는 되도록 평이하고 간결한 책을 집필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다 쓰고 보니, 원서로 55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능한 한 짧게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자본론』의 중요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해설하다 보니, 이 정도 길이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출판 직후에는 “이렇게 긴 책이라면 그다지 널리 읽히지 않겠지”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많은 독자분께서 읽어 주셔서 기뻤습니다. 원문을 인용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정성껏 상세하게 해설하는 스타일이 공을 세운 것이겠지요. 그래서 다소 무리한 부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가도카와의 편집자님께 『자본론』 제3권에 대한 해설서를 비슷한 스타일로 간행할 수 있는지 상담해 보았더니, 좋다는 답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르크스 자본론 제3권』은 더욱 두꺼운 책이 되고 말았지만, 다행히도 이 책 역시 많은 독자분께서 읽어 주시는 듯합니다. 일반 시민이나 젊은 연구자들로부터 이 책으로 독서 모임을 하고 있다는 희소식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더욱 기쁘게도, 제가 존경하는 마르크스 연구자 중 한 분인 정성진 교수님께서 주선해 주셔서 한국어 번역판을 간행하게 된 것입니다. 『마르크스 자본론』의 번역에 앞서 『마르크스 자본론 제3권』의 한국어 번역판이 간행된 이유로는, 정성진 교수님께 듣기로는 한국에서는 제3권에 대해 해설한 책이 거의 없어, 출판 시장에서 ‘희소성’이 높다는 사정이 있는 듯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 책이 번역되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지만, 이 책에서도 곳곳에서 참조하고 있듯이, 제3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1권의 이해 또한 빠뜨릴 수 없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마르크스 자본론』 역시 번역되기를 바랍니다(그때까지는 졸저 『한 권으로 읽는 마르크스와 자본론』(정성진 옮김, 산지니, 2020)에서 『자본론』 제1권을 해설한 부분을 봐 주십시오). 그렇다 해도, 애초에 왜 제2권이 아니라 제3권 해설서를 먼저 간행했는지 궁금한 분들도 계실 터입니다. 여기에는 주로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가 2018년경부터 『자본론』 제3권 초고의 일본어 번역 작업에 매진해 왔다는 점입니다(제3부 주요 초고의 일본어 번역은 내년이나 내후년에 사쿠라이서점桜井書店에서 간행될 예정입니다). ‘머리말’에서도 서술했듯이, 현재 일반적으로 구할 수 있는 엥겔스 편집 『자본론』 제2권이나 제3권은 엄밀하게는 마르크스의 저작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마르크스 자신의 텍스트를 일반 독자용으로 소개하려면 초고의 번역이 필요하지만, 그 작업이 지금까지는 제3권만 완료되었기에, 제2권 해설서에 먼저 착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현재 제2권 초고도 번역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완성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다음으로, 순수하게 연구상의 관점에서 보아도, 연구를 마르크스 자신의 이론적 발전의 추적이라는 형태로 수행하는 한, 제1부(제1권) → 제3부(엥겔스판 ‘제3권’) → 제2부(엥겔스판 ‘제2권’)라는 순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정이 있습니다. ‘인물과 작품’을 보면 아시겠지만, 마르크스는 1863년부터 1865년에 걸쳐 제1부부터 제3부까지의 초고를 일단 완성하고, 제1부에 대해서는 그 초고를 바탕으로 『자본론』 제1권을 1867년에 간행하지만, 제2부와 제3부에 대해서는 충분한 완성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 후 개고 작업에 들어갑니다. 제3부에 대해서는 제1장의 서두 초안을 네 개 정도 쓰는 데 그쳤지만, 제2부에 대해서는 그 후 만년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초고를 여러 개 썼으며, 최초에 쓴 초고를 전면적으로 다시 썼습니다. 따라서 만년에 쓴 제2부의 초고는 미간행으로 끝났다고는 하나, 마르크스의 경제학비판 관련 텍스트 중에서 가장 이론적 수준이 높은 것이며,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전에 쓴 제2부 초고는 물론이고 제1부나 제3부 초고의 내용도 충분히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가장 본질적인 이유지만, 제3부의 내용이 현대자본주의 분석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자본론』 제3부(엥겔스판 ‘제3권’)를 해설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어 본격적으로 전개하진 않았지만, 필자는 현대자본주의가 렌트(노동에 의해서는 생산 곤란한 생산(상업) 조건의 독점에 기초한 수익. 이 책 제7장 참조)의 취득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타입의 자본주의, 즉 ‘렌트 자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렌트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제3부에서 전개되는 지대(토지의 독점에 의해 취득되는 렌트)론을 참조할 필요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왜 산업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가 쇠퇴하는 가운데, 소비를 중심으로 한 포스트포디즘이나 금융 자본주의가 대두될 수 있었는지, 왜 현재 ‘렌트 자본주의’의 힘이 이토록 막강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3부의 주제를 이루는 ‘형상화形象化’에 대한 이해가 빠질 수 없습니다. 제3부의 이론적 핵심을 이루는 형상화론이야말로, 자본의 수익 형태가 잉여가치로부터 질적 및 양적으로 자립화해 가고, 최종적으로는 렌트의 형태에서 노동의 희소성에 의거하지 않는 ‘허위의 사회적 가치’의 수탈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해 주셨으면 하는 점은 여기서의 ‘가능’이란 단지 경제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권력론적인 의미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노동 성과의 착취나 부의 수탈은 결코 순수하게 경제적인 구조나 제도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일정한 권력관계가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임금노동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임금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것은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상만 보면 이것은 틀리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노동력을 기업에 판매하고, 자본가에게 착취당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생산수단 — 즉 공장이나 기계 등의 생산 설비, 나아가 생산에 필요한 원료 — 을 갖고 있지 않고, 그것들을 자본가들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이러한 경제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이며, ‘제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을 개량하거나 변혁하기 위한 방책은 선거에서 좌파 정당의 의원을 늘리거나, 혁명 정당의 멤버를 증대시키기 위한 정치 운동이라는 결론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마르크스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자본론』이 그토록 복잡하고 난해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예를 들어,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1935- )는 가치형태론의 까다로운 논의를 “극단적으로 지루한 설명”이라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마르크스 자신은 그것이 “이 책(󰡔자본론󰡕) 전체에 있어 너무나도 결정적”(MEW 31, 306)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 책(654쪽, 제7장 4절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특징짓는 것 ① ─ 물상화와 그것에 기초한 권력)에서도 인용되어 있듯이, 상품의 물신적 성격 속에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전체를 특징짓는 사회적 생산 여러 관계의 물상화나 생산자와 생산수단 관계의 전도轉倒가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마르크스는 상품 장의 가치형태론이나 물신성론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가치형태론이나 물신성론이 중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그 이론들이야말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최대의 권력인 자본 권력의 가장 깊숙한 기초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이란 자기증식하는 가치(주체화된 가치)와 다름없지만, 이 주체화된 가치의 권력 기초에 있는 것이 가치의 권력(물신성론)이며, 화폐(자립화한 가치)의 권력(가치형태론)인 것입니다. 이 이상 장황하게 설명하면 『자본론』 그 자체의 해설이 되어 버리므로, 결론만 말하자면, 우리를 지배하는 가치, 화폐, 자본의 권력은 우리 자신의 나날의 행위, 즉 사적 노동과 임금노동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시스템이 아무리 강력하게 보일지라도, 만약 우리가 일제히 사적 노동과 임금노동을 그만둔다면, 이들 권력은 사라져 버리고, 현재와 같은 가치나 화폐의 힘에 입각한 근대적 사적 소유 제도도 성립하지 않게 되고 맙니다. 실제로 과거 혁명 정세에서 ‘총파업’ 때는 공장을 자주 관리하고, 자신들 스스로 경제를 통제함으로써, 그러한 상태가 일시적이고 국소적으로나마 출현했습니다. 재해 등 위기적인 상황 하에서 사람들이 함께 협동하는 ‘재난 유토피아’도 그러한 사례 중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과거의 소련이나 현재의 중국처럼, 아무리 국가가 자신들의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라고 선언하고,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거나, 토지를 국유화했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생산수단에 대한 접근이 보장되어 있지 않고, 자신들 스스로 생산을 제어할 수 없는 한, 그리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사적 노동이나 임금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치, 화폐, 자본의 권력은 사라지지 않고, 시장 메커니즘의 영향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그러한 사회들을 ‘국가자본주의’라고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그렇다 해도, 임금노동이라는 행위 그 자체를, 우리가 바로 현존하는 제도에 의해 강제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확실히 개인으로서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임금노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자신만이 임금노동에서 이탈하여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곤란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곤란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임금노동을 함으로써 가치, 화폐, 자본의 힘을 — 다른 말로 하면, 그것들이 없으면 생산이나 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 없다는 상황을 — 계속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집합적으로 우리 자신의 행위를 통해, 우리에게 임금노동을 강제하는 권력, 혹은 그것이 권력으로서 작동하는 상황을 계속 재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를 마르크스는 ‘물상화物象化’라고 불렀습니다. 이 표현은 완성고인 『자본론』 제1권에는 한 번밖에 나오지 않지만, 내용적으로는 일관되게 이 물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다른 초고에서는 이 단어가 제법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아무튼, 이처럼 자신들 스스로 자신들의 생산 방식을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시장경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수용하게 되고, 생산물이 가치를 가지며, 상품으로서 판매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갑니다. 이러한 환상을 낳는 상품의 성격을 상품의 ‘물신적 성격’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환상은 화폐에 대해서도, 자본에 대해서도 발생하게 됩니다. 나아가, 물상화가 발생하면, 필연적으로 물상의 인격화라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물상(상품, 화폐, 자본 등)의 인격적 담지자로서 행동하게 되면, 사람들 자신의 욕망이나 의지의 양상이 변용되어 버리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사용가치에 대한 욕망뿐만 아니라, 가치 그 자체, 단적으로는 화폐에 대한 욕망이 발생하고, 이것이 점점 더 우위가 되어 갑니다. 사용가치에 대한 욕망 그 자체도 변용되어,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상품을 소비하는 것 자체에 대한 욕망으로 슬며시 바뀌어 갑니다. 또한, 소유란 사람들이 물건을 소지하거나 점유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승인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승인이 오로지 상품이나 화폐라는 물상의 힘에 의존하여 이루어지게 됩니다. 원래 소유의 승인 방식에는 전통이나 신분, 종교나 윤리 등 다양한 유형이 있었지만, 그것이 시장에서의 거래로 일원화되어 가고, 그 결과, 소유는 매우 배타적인 성질을 띠게 됩니다. 이것을 근대적 사적 소유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물상의 인격화를 기반으로 하여, 상품이나 화폐의 담지자로서의 자유, 평등, 소유야말로 본래의 자유, 평등, 소유이며, 그것에 기초하여 사적 이익을 추구하여 행위하는 것이야말로 사회 전체의 이익을 실현할 수 있다는(공리주의) 환상, 즉 “자유, 평등, 소유, 그리고 벤담” (『자본론』 제1부 제4장)이 사회에 깊이 뿌리내려 갑니다. 이렇게 해서, 물상화에 저항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져 갑니다. 그렇다 해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안정적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물상화에 의해 물상의 권력이 발생하고, 물상의 인격화에 의해 사람들의 욕망의 양상이나 의지의 양상이 변용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생존에 필요한 토지나 생산수단에 자신들의 의지로 직접 접근할 수 없고, 항상 시장관계를 통해, 단적으로는 화폐의 힘을 통해 접근해야만 하며, 그 화폐를 입수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담지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역사적으로 보면 지극히 이상한 상태에 모든 사람이 적응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자본주의 발흥기에는 인클로저에 의해 토지를 잃은 많은 사람이, 얌전히 임금노동자가 되는 대신, 산적이나 걸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 메커니즘 그 자체의 힘만으로는 시장을 원활하게 작용시킬 수 없으며, 화폐의 도량 단위를 통일하거나, 지폐에 강제 통용력을 부여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물상화 및 물상의 인격화의 한계를 매개하고, 조정하는 것이 국가에 의해 성립하는 법률이나 제도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법률이나 제도는 어디까지나 물상화된 사회시스템을 보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그렇다면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긴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대부분은 오히려 자본주의 시스템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법률이나 제도라는 매개가 필요하다는 사정에만 주목한 나머지, 그것들이 사회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전도된 견해(‘법학 환상’ 내지 제도 환상)에 빠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법률이나 제도를 개선하는 것뿐이라든가, 생산을 제어하려면 기업을 국유화하면 된다는 식의 흔한 관점에 빠져들게 됩니다. ‘인물과 작품’에서도 설명했듯이, 이 책의 주제를 이루는 형상화는 이상에서 서술해 온 물상화가 현상적 메커니즘에서 전개된 것과 다름없습니다. 제1부와 제2부에서는 생산자와 생산물 사이에서 발생하는 권력관계, 즉 생산자와 생산물 및 생산수단과의 관계의 전도가 주제가 되었습니다. 즉 생산자들이 아니라 시장이, 생산자가 아니라 자본이 생산을 지배한다는 전도입니다. 이에 대해, 제3부에서는 이상의 전도, 즉 물상화를 기초로 하여, 자본의 수익 형태가 자립화하고, 마치 자본이 임금노동과 독립적으로 수익을 취득할 수 있는 것처럼 — 그리고 또한, 개별 자본가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 나타납니다. 즉, 여기서는 단지 생산자와 생산물 및 생산수단의 관계가 전도되어, 생산물 내지 생산수단 측이 힘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그 힘을 기초로 하여, 생산자들로부터 자립하여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형상화에서는 물상화가 한층 더 심화됩니다. 구체적으로 봅시다. 예를 들어, 이자는 화폐를 빌려줌으로써 취득할 수 있는 수익이며, 개별적인 사례만 보면 반드시 임금노동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 해도, 이자라는 수익 형태가 정당성을 획득하고, 사회 전체로 퍼지기 위해서는 임금노동이 불가결합니다. 임금노동이 일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도 이자는 존재했지만, 그러한 현물경제 중심의 사회에서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이자를 받아 내는 것은 곤란했으며, 많은 경우, 차입자나 사회 전체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근대 사회가 되기까지, 종교적으로 이자가 금지되거나 윤리적으로도 기피되어 온 이유입니다. 그런데, 화폐 경제가 발전하고, ‘본원적 축적’(『자본론』제1부 제7편)을 통해 임금노동이 일반화되면, 사정은 일변합니다. 임금노동이 일반화된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상당한 액수의 화폐가 있으면 그것을 자본으로 투하하여 잉여가치를 취득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 책의 제1장에서 보듯이, 자본가들에게는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을 구별한다는 발상이 없으며, 게다가 생산수단과 생산자 사이에서 전도가 발생하여, 생산자가 생산의 주체라는 관계조차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이 잉여가치는 임금노동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투하 자본 전체의 산물로서, 즉 ‘이윤’으로서 나타납니다. 화폐자본가들은 그러한 사업을 하는 자본가들에게 자본을 빌려주고, 그들의 이윤 일부를 받는 방식으로, 지속가능한 형태로 이자를 취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상화 프로세스를 통해, 이자는 그 일반화의 현실적 근거와 정당성의 근거를 획득합니다. 왜냐하면, 화폐 경제가 보급된 사회에서는 물상의 인격화로서 자유의사의 거래를 행하는 것이야말로 공정하기 때문이며, 임금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자본을 투하함으로써 이윤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거기서는 화폐를 빌려주는 것은 사회를 파괴하기는커녕, 오히려 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에 불가결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처럼 이자는 임금노동을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비로소 그 성립 근거를 부여받는 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폐자본가가 화폐를 빌려주는 상대는 임금노동자가 아니라 산업자본가나 상업자본가이므로, 이자는 완전히 임금노동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자신의 화폐자본에 의해 자립적으로 얻어지는 것처럼 나타나며, 개별 사례를 보더라도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나아가, 이 이자를 기반으로 가공자본이 성립하고, 현재의 금융시장에서 행해지는 여러 복잡한 거래가 가능해지며, 그에 의한 부의 수탈 또한 정당화되고 있는 셈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 책의 제5장을 참조해 주십시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지 이자의 출처가 잉여가치의 일부라는 식의 경제학적 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왜 이자가 정당성을 획득하고, 자립적인 수익 형태로 정착할 수 있는가, 혹은 그러한 권력관계가 어떻게 하여 성립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일은 지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애초에 토지는 현재처럼 상품으로서 매매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령 일정한 소유관계하에 놓인다 해도, 거기에는 왕, 영주, 교회, 농민들의 중층적인 권리 의무 관계가 겹겹이 쌓여 있어,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도 보듯이, 마르크스는 토지가 가진 풍요로운 성질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며, 모두가 공유하며 계승해 가야 할 ‘커먼’(공유물)이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그러한 ‘커먼’적인 성질 때문에 인류는 토지를 어떤 식으로든 공동적으로 관리해 왔습니다. 그런데, 생산자가 토지에 대한 접근권을 갖지 못하는 임금노동이라는 노동 방식이 일반화되고, 또한, 물상화의 진행과 함께 근대적 사적 소유가 침투하면, 토지는 나날이 그것을 이용하고 그 은혜를 향유하는 생산자들로부터 분리되어 버립니다. 토지는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가격이 매겨지고, 그 소유자가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물상이 되어, 오로지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 가능해져 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토지소유자는 근대적 의미의 ‘지대’를 취득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셈이지만, 이 지대는 본질적으로 자본 투하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자의 경우에는 그나마 빌려준 화폐자본이 산업자본가나 상업자본가에 의해 현실의 산업이나 상업에 투하되어, 잉여가치의 생산이나 실현의 확대에 도움이 되는 일이 있었지만, 지대를 가져오는 토지의 소유권은 그 자체로서는 잉여가치의 생산이나 실현에 어떠한 적극적인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소유자가 지대를 취득할 수 있는 것은 왜일까요? 바로 토지소유자가, 사람들의 노동에 의해 생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공유하고 계승해 가야 할 토지를 근대적 소유의 원리에 기초하여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물상의 인격화로서 행동하는 한, 토지소유자가 본래 커먼이어야 할 토지를 배타적으로 독점하여 지대를 취득하는 것은, 그것이 지주와 임차인 사이의 자유의사에 기초하고 있는 이상, 완전히 정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나아가, 자본가가 토지 구입에 ‘자본’을 투하하는 경우에는, 토지에 대한 투자의 대가로서 지대가 얻어진다는 식으로 사태는 나타납니다. 여기서는 토지 소유권은 가공자본이 되어, 지대의 취득은 한층 더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지대가 노동의 희소성에 의해 뒷받침된 잉여가치로부터 분배된 것이 아니라, ‘허위의 사회적 가치’(노동의 희소성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 아니라, 생산 불가능한 생산수단의 독점에 의해 사회적으로 덧붙여진 허위의 가치 부분)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지대론이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순수한 부의 수탈이 형상화의 전개를 통해 그 현실성과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3부 주요 초고에서 언급한 것은 지대뿐이지만, 본래 노동(보다 정확하게는 자본이 동원하는 임금노동)에 의해 생산할 수 없거나 곤란하면서도 희소한 것, 즉 커먼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면, 그것을 배타적으로 독점함으로써 초과이윤(평균이윤을 넘는 이윤)의 취득을 구조화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때의 초과이윤을 ‘렌트’라고 부릅니다. 즉 커먼을 배타적으로 독점할 수 있으면 렌트를 취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르크스도 토지 외에 철도를 예로 들지만, 그러한 사회 기반 시설의 독점도 렌트의 취득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나아가, 현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디지털 영역입니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등의 디바이스를 통해 접근하는 디지털 플랫폼(전자상거래, 소셜미디어, 콘텐츠 전송 플랫폼, 클라우드 서비스, 앱스토어, 전자결제)이나 각종 애플리케이션, 생성형 AI는 물론이고, 사물 인터넷에 의해 연결된 공장, 사무실, 도시 교통, 나아가 사람들의 생활 영역도 디지털 영역에 포섭되어 있습니다. 이제 디지털 영역과 무관하게 산업 활동, 상업 활동, 소비 활동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이 디지털 영역은 거대 자본에게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산업이윤이나 상업이윤을 실현하는 장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렌트의 취득을 가능하게 하는 장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 부문에서는, 인프라 부문이 자연독점을 통해 초과이윤을 취득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네트워크 효과를 초과이윤의 원천으로 삼을 수 있고, 게다가 그 효과를 끊임없는 데이터 수집 → 알고리즘 개선 → 추가적인 데이터 수집이라는 순환을 통해 끊임없이 강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디지털 영역에서는, 말하자면, 자본 자신에 의해서는 생산할 수 없는 우리의 사회적 생활이나 협동 그 자체가 생산수단이 되어 있으며, 이것을 네트워크 효과가 가져오는 탈퇴 비용이나 데이터 수집에 기초한 알고리즘의 힘으로 둘러쌈으로써, 독점적 지위를 구축하고, 렌트를 취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현재는 렌트의 취득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매우 큰 의미를 갖게 되었지만, 이 점은 바로 현대사회가 위기적 상황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렌트란 사회적으로 보호하고 세대를 넘어 계승해 가야 할 커먼을 화폐의 힘으로 개인이나 민간 법인이 배타적으로 독점하여 사적 이익을 위해 이용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처럼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의 귀결로서 산업자본의 축적이 막다른 길에 부딪혀, 렌트의 비중이 증대하고 있다는 것은 단지 사회적 부의 수탈이 증대하고, 격차가 확대되며, 빈곤이 증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인류의 장기적인 활동에 가장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는 요소를, 눈앞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소모해 버리는 태도가 점점 더 일반화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르크스가 우려했던 환경 파괴는 이제 문명의 존속을 위태롭게 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현재의 소셜미디어 상황만 보아도, 사람들이 연대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생활과 협동이라는 커먼이 알고리즘의 영향으로 궤멸적인 손상을 입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생성형 AI와 같은 한층 더 강력한 알고리즘이 점점 더 우리를 둘러싸고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자본주의의 위기와 자본주의에 의한 포섭이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 바꾸어 말하면 위기가 자본주의 시스템 측과 그것에 저항하는 측에서 이중으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정보 기술의 발전에 따라 도래한 커뮤니케이션 사회가 코뮤니즘의 가능성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냐는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1933-2023)의 질문에 대해, 질 들뢰즈Gilles Deleuze(1925-1995)는 “언론과 커뮤니케이션은 구석구석까지 금전에 침식당해 있다”라고 대답했지만, 바로 그대로의 상황이 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성질 변화는 이미 ‘새로운 사회운동’의 아카데미즘화에 의해 시작되고 있던 체제 내로의 편입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소셜미디어에서 인플루언서와 같은 형태로 개인주의화를 강화하고, 사회적 연대의 가능성을 현저히 저해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렌트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진행되는 가운데, 커뮤니케이션 영역이라는 커먼이 침식당하고, ‘새로운 사회운동’의 부르주아적 권리로의 전환과 개인의 분단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확실히, 20세기 말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1960- )가 제시했던 비전은 선구적이었고,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현대의 공산주의 운동은 과거와 같은 이론적 중심(마르크스·레닌주의)이나 정치적 중심(코민테른)을 갖지 않으며, 상향식으로, 다양한 운동이 연대해 가야 하고, 민주집중제의 상의하달에 의한 정치혁명을 제1 목표로 삼지 않고, 좀 더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사회 혁명 그 자체를 지향한다는 비전은 많은 급진적 좌파에 의해 공유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시해야만 하는 것은 이러한 양면적인 위기 — 즉, 자본주의 시스템의 위기인 동시에 대항시스템 운동 그 자체의 위기라는 — 시대 상황 속에서, 기존 비전의 유통기한이 끝나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일찍이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1871- 1919)나 카를 코르쉬Karl Korsch(1886-1961)가 사회민주주의에 대항하고자 등장한 레닌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끝을 겨누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고투했던 것처럼,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레닌주의의 보수화 형태) 쌍방을 극복하려 했던 네그리 등의 비전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끝을 겨누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만 합니다. 물론, 이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언뜻 보기에, 룩셈부르크나 코르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비전의 기반이 될 만한 사회적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이제 축적체제로서의 자본주의의 명운은 다해 가고 있으며, 이제 수탈체제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위기를 상례화하고, 악화시키는 가운데, 권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최근 권위주의의 대두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위기를 전제로 하여 그 위기 속에서 어떻게 비전을 그려 낼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노력에 있어서 유행하는 아이디어에 섣불리 올라타거나, 아카데믹한 권위에 기대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원리적 사유의 차원에서 재검토를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일찍이 룩셈부르크는 사회민주당의 보수화에 맞서기 위해, 『자본론』 제2권의 사회적 총자본의 유통과정을 치밀하게 연구했습니다. 레닌Vladimir Lenin(1870-1924)은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에 직면하여, 철학사에서 가장 난해한 저작 중 하나로 꼽히는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의 『대논리학』연구에까지 되돌아갔습니다. 코르쉬는 사회민주주의와 레닌주의 쌍방을 극복하기 위해, 만년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의 저작을 문자 그대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를 극복하는 것과 같은 공산주의의 비전을 끊임없이 탐구했습니다. 지금 바로 필요한 작업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현재에도, 수호해야 할 경전으로서가 아니라, 원리적 사유의 재검토를 위한 ‘무기’로서 읽는다면, 마르크스의 저작, 특히 그의 주저인 『자본론』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위대한 지적 원천 중 하나로 계속 남을 것입니다. 모쪼록 이 책이 그러한 마르크스 다시 읽기에 도움이 되기를 마음으로부터 바랍니다. 2025년 9월 사사키 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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